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령왕비 금제 관식 (문단 편집) == 내용 == [[파일:무령왕비 금제 관식2.jpg]] 복원을 완료한 모습. 왼쪽 관식 높이 22.6 ㎝, 너비 13.4 ㎝ 오른쪽 관식 높이 29.2 ㎝, 너비 13.4 ㎝ 1971년 백제 [[무령왕릉]]에서 출토된 무령왕비의 금제 관식으로, 유물의 제작연대는 6세기이다. 당시 왕릉에서 관 꾸미개는 모두 4점이 출토되었는데 [[왕]]과 [[왕비]]의 머리 부분에 각각 2점씩 쌍을 이룬 채로 발견되었다. 왕의 것은 [[무령왕 금제 관식]]이란 명칭으로 국보 제154호로 따로 지정되었다. 원래는 발굴 당시 일부분이 파손된 상태였는데 2012년, 발굴 40년만에 보존처리 및 원형복원을 한 것이다.[[http://www.cctimes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276257#08W8|충청타임즈 : 무령왕비 금제관식 원형 회복]] 전체적인 제작방법은 [[무령왕 금제 관식]]과 동일하게 2㎜ 두께의 얇은 순금판을 두드려 편 후 문양에 따라 오려내는 기법을 사용하였지만, 왕의 것과는 달리 금달개, 영락 등의 장식은 따로 달지 않았다. 그리고 순금으로 이루어진 왕의 것과는 달리 아래쪽 부분은 따로 [[구리(원소)|구리]]로 된 것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. 이러한 연화현병 인동당초문 문양은 [[중국]]으로부터 유행한 것으로 대표적으로 이보다 앞선 중국 [[육조시대]] 전기 [[하남성]](河南省)에서 발견된 고분현실 석문 빗살무늬 석조의 문양이 이 무령왕, 무령왕비 금제 관식과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. 관식에 사용되는 인동당초문은 계급 사회의 지위를 나타내려는 의도로 시문되는 중국의 전통적 귀족 문양으로, 중국 육조에서 내려온 [[불교]] 미술의 영향이 짙다고 할 수 있다. 당시 한반도 남부에 유행했던 중국 문화에 대해 연구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. 특히 이보다 1세기 정도 앞서 만들어진 [[신라]]의 [[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|금관총 금제 관식]], [[천마총 금제 관식]] 등과 함께 [[한국]]의 고대 금제 관 꾸미개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. 매우 미려하고 호사스러운 형식을 보여주는 유물로, [[무령왕 금제 관식]]과 함께 백제의 순황금 유물 중 최고의 예술성을 갖추었다고 평가되므로, 신라의 각종 [[금관]]([[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|금관총 금관]], [[황남대총 북분 금관]], [[천마총 금관]], [[서봉총 금관]], [[금령총 금관]] 등) 및 [[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]] 등의 최고 위세품들과 함께 [[한국]] 고대사에 있어 최상위 예술품으로 손꼽힌다. 6세기 백제의 화려한 금 공예술을 보여주는 왕비의 유물로, 그 화려함은 가히 으뜸이라 할 만하다. 이에 1974년 7월 9일 국보로 지정되었다. [[파일:무령왕비 금제 관식3.png|width=500]] 1955년부터 매년 [[공주시]]와 [[부여군]]에서 개최하는 백제문화제의 마스코트 중 하나인 '금이'가 이 무령왕비 금제 관식을 모티브로 제작된 것이다. 옆에 있는 짝꿍 마스코트 '동이'는 [[백제금동대향로]]를 모티브로 했다.[[http://baekje.org/kor/html/sub01/010101.html|백제문화제 홈페이지]], [[http://www.baekje.org/kor/html/sub01/010202.html|백제문화제 상징물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